엎드러진 에스겔 앞에 손이 펼쳐지고 두루마리가 건네지는 장면 — 두루마리 안팎으로 애가와 슬픔과 재앙이 기록된 가운데, 에스겔이 그 말씀을 받아 삼키는 신성한 순간. 그발 강가의 저녁빛과 두루마리의 금빛이 대비되는 화면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주의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 …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배에 넣으며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 에스겔 2:1-2; 3:1-3
그발 강가의 압도적인 환상(겔 1장) 앞에서 에스겔은 엎드러졌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인자야 일어서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주의 영이 그를 일으켜 세웁니다(2:1-2).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스겔이 스스로 일어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성령의 능력으로 그가 선지자로 세워집니다. 부르심은 언제나 이와 같습니다 —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시고, 성령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사명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라. 그들이 반역한 민족이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말씀을 전하라(2:3-7).
두루마리를 받아 먹는 장면(3:1-3)은 선지자의 사명에 대한 가장 강렬한 상징입니다. 두루마리에는 "애가와 슬픔과 재앙"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2:10). 전달해야 할 말씀은 듣기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두루마리를 삼키자 입에서 꿀처럼 달았습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역설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내용이 아무리 엄중하더라도, 그 말씀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이기 때문에 영혼에 달콤합니다. 요한계시록 10장에서 사도 요한도 동일하게 두루마리를 받아먹으며 이 장면을 반복합니다. 에스겔의 사명은 단지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자기 안에 먼저 완전히 소화하고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두루마리 안팎으로 빽빽이 기록된 애가와 슬픔과 재앙의 말씀들 — 에스겔이 받은 사명의 무게를 상징하는 펼쳐진 두루마리. 슬픔의 내용이지만 꿀처럼 달았던 하나님의 말씀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명령을 받은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읽는 것을 넘어 '삼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 배에 들어가고 창자에 채워진다는 표현은, 말씀이 우리의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결정을 형성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매일 성경을 읽지만 삶이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말씀을 읽되 삼키지 않은 것입니다. 에스겔처럼 말씀이 우리 안에 내주하여, 그 말씀이 우리 입술과 손과 발을 통해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백성이 듣든 듣지 않든 상관없이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2:5, 7). 결과의 책임은 에스겔에게 있지 않습니다. 선지자의 책임은 충성스럽게 전하는 것, 그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혹은 진실을 말해야 할 때, 상대방의 반응이 두려워 침묵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충성스럽게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두루마리에는 슬픔과 재앙이 적혔지만, 삼키니 꿀처럼 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읽는 것이 아니라 삼키는 것입니다.
오늘 당신은 말씀을 읽었습니까, 아니면 삼켰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