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 마가복음 3:17 · Day 03

보아너게 —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

Boanerges — Sons of Thunder

요한 · Day 03
보아너게 —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 마가복음 3:17  |  Sons of Thunder
요한 Day 03

갈릴리의 한 언덕, 늦은 오후의 하늘에는 멀리서 한 소나기 구름이 우레를 머금고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그 언덕 위에 한 분이 서 계시고, 그 둘레에 열두 청년이 둥글게 서 있다. 그 가운데 두 형제 — 야고보와 요한 — 의 어깨 위에 한 분의 두 손이 부드럽게 얹히고, 그분의 입술에서 한 별명이 처음 흘러나온다 "보아너게." 그 한 마디 위에, 멀리서 우레가 한 번 길게 울린다. 거친 기질을 부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랑의 그릇으로 빚어 가시는 한 분의 미소가 두 청년의 가슴 안으로 깊이 스며드는 한 거룩한 오후.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곧 베드로라는 이름을 더하신 시몬과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 마가복음 3:16–17

마가복음 3장의 한 명단은 그저 열두 사도의 이름을 적어 놓은 한 행정적인 한 기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명단 한복판에 한 분이 직접 두 형제에게 따로 한 별명을 더하셨다는 한 사실은, 깊이 들여다볼수록 따뜻한 한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시몬에게는 "베드로"(반석)라는 한 이름을 더하셨고,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보아너게"(βοανηργές, 보아네르게스)라는 한 별명을 더하셨습니다. 마가는 친절하게 그 뜻을 풀어 적어 줍니다 —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막 3:17). 아람어 "베네 레게쉬"(בני רגש, 분노/소동의 아들들) 또는 "베네 라암"(천둥의 아들들)에서 온 한 별명이라고 학자들은 봅니다. 그 한 별명에는, 두 형제의 평소의 한 기질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 자기 형제 사마리아인이 자기 한 분을 받아들이지 않자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4)라고 즉시 한 마디를 토해내던 한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가슴은 사랑이 깊은 만큼 분노도 깊었고, 충성이 뜨거운 만큼 그 뜨거움이 다른 사람을 데우기도 하고 태우기도 하는 한 거친 한 기질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 한 분은 그 거친 기질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기질이 너무 거치니 좀 부드러워지라"고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기질에 한 별명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보아너게" — 우레의 아들들. 한 분이 한 사람에게 별명을 지어 주신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모든 모습을 정직하게 보시면서도 그 모든 모습을 자기 사람으로 받아들이신다는 한 거룩한 표현입니다. 한 분은 두 형제의 거친 우레와 같은 기질을, 사랑의 그릇으로 다시 빚어내실 한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한 분의 그 사랑이 정말 그 한 우레를 한 사랑의 음성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한 증거가, 사천 년 후의 신약 성경 안에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 사마리아 마을에 불을 내리려 하던 그 한 청년이, 평생의 끝자락에 이르러 한 마디를 거듭거듭 적습니다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요일 4:7). 우레의 아들이 사랑의 사도가 된 한 변형, 그것이 한 분이 한 사람에게 한 별명을 지어 주신 한 까닭이었습니다.

요한 Day 03 보조

늙은 사도 요한이 한 손에 깃펜을 들고 양피지 위에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써내려 간다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책상 한쪽에는 그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한 어부의 거친 그물이 놓여 있고, 그 옆에 한 분의 발자국을 따라가던 그의 젊은 날의 한 그림자가 황금빛 잔상으로 어른거린다. 우레가 사랑의 글이 되고, 거친 그물이 부드러운 깃펜이 되는 한 일생의 거룩한 변형.

한 분이 두 형제에게 "우레의 아들들"이라는 한 별명을 따로 지어 주셨다는 한 사실은,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는 데에 한 가지 깊은 위로가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한 가지 거친 기질을 안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분노가 빠르고, 어떤 사람은 말이 거칠고, 어떤 사람은 사랑이 너무 뜨거워서 다른 사람을 태우기도 합니다. 우리는 흔히 그 거친 부분을 자기 신앙의 한 부끄러움으로 여기고, 한 분 앞에 가지 않으려 합니다. "내가 이런 사람인데 어떻게 한 분 앞에 가겠습니까." 그러나 한 분은 그 거친 부분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거친 부분을 정확하게 보시면서, 그 부분에 한 별명을 지어 주십니다. 그 별명은 책망이 아니라 한 부르심입니다. "보아너게" — 너의 우레와 같은 그 거친 기질을 내가 정확히 안다, 그러나 나는 그 기질을 한 사랑의 그릇으로 다시 빚어내겠다, 라는 한 분의 한 사랑의 약속입니다.

또 한 가지 — 우레의 아들 요한이 사랑의 사도로 변형된 그 한 일생의 한 비밀은, 그가 자기 노력으로 자기 거친 기질을 다스린 데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평생토록 한 분의 품에 가까이 머물렀던 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다가"(요 13:23). 사람의 거친 기질은 자기 의지의 단속으로는 결코 부드러워지지 않습니다. 다만 한 분의 가슴에 한 발 더 가까이 머무는 그 시간 안에서, 그분의 가슴 박동의 리듬이 자기 가슴 안으로 천천히 옮겨 옴으로써만 부드러워집니다. 그러므로 오늘 당신이 자기 안의 한 우레를 다스리려고 애쓰며 지친 자리에 있다면, 한 분의 가슴에 한 발 더 가까이 머무는 그 한 자리를 회복하십시오. 사천 년의 한 우레가 사랑의 한 음성이 되었던 그 변형은, 오늘 당신의 한 우레에게도 똑같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한 분은 당신의 거친 기질을 부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기질에 한 별명을 지어 주십니다.
우레가 사랑이 되는 변형은, 자기 의지의 단속이 아니라 한 분의 품에 가까이 머무는 시간 안에서 일어납니다.
오늘, 자기 안의 우레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 우레를 안은 채로 그분의 가슴 곁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머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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